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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 Interveiw] 경계의 끝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언어와 음악, 뮤지션 이이언 (eAeon)

2024.05.07. Artists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사운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서정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음악, 그 음악에 담긴 상실과 허무의 감정, 그리고 인간 내면의 이야기로 자신만의 깊은 음악 세계를 그려온 뮤지션 이이언(eAeon)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씬에 깊은 흔적을 남긴 모던 록 밴드 못(Mot)을 시작으로 솔로 프로젝트, 나이트오프(Night Off)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그의 넓은 예술 세계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최근 또 다른 스타일로 구축된 솔로 음악과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과의 협업으로 서정과 기술의 경계, 자신의 세계관을 더욱 확장하고 있는 그를 기어라운지가 인터뷰를 통해 만나봤습니다.



GL: 안녕하세요, GL Interview로 찾아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독자분들에게 간단한 인사와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이언: 안녕하세요. 이이언입니다. 밴드 못과 나이트오프, 그리고 솔로 뮤지션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미디어아트 작업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GL: 최근엔 큰 프로젝트보다 피처링, 협업으로 이이언 님의 이름을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요,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이언: 계속 꾸준히 작업물을 모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작년엔 호드와 얨냼, 제가 키우는 강아지들과 함께 송캠프 삼아 여행도 몇 군데 다녀왔고요. 나이트오프의 앨범과 솔로 앨범의 곡들을 차곡차곡 쌓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가 공개될 시점에는 아마 발매가 되었을 텐데, 만동이라는 밴드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하고 뮤지션 유라의 프로듀서로도 활동하고 있는 송남현 님의 "예를들어 푸른색의"라는 곡의 탑라인과 가사, 믹스로 참여하여 발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열심히 준비 중인 크루, 뮤지션 컬렉티브의 컴필레이션 앨범도 6월 발매를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GL: 이이언 님이 함께한 뮤지션 컬렉티브라니 궁금해지는데요, 디테일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이언: 뭐랄까, 차트인이나 상업성을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음악들이 있잖아요? 그런 예술 작업으로서의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 몇몇이 모여서 만들어진 ‘박쥐단지’라는 느슨한 모임이에요. 서로의 음악에 대한 리스펙트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연대 보증이자 브랜드이기도 하고요. 각자가 개인으로 활동할 때보다 서로가 모이면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쉬워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재미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 진행된 프로젝트예요. 현재로는 최근 일렉트로닉 씬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김도언, 실리카겔의 김한주, 김아일, 메사니, 저 이이언, 제이클레프, 차종환, 황휘, 총 8명의 뮤지션이 참여하는 컬렉티브입니다. 아마 이 컴필레이션 앨범은 6월 초쯤에는 들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앨범의 음악들은 전자음악이 많긴 하지만 사실 어떤 확실한 방향성을 규정한 건 아니에요. 전반적인 목표를 가지기보다 ‘각자가 제일 잘하는 음악을 해보자!’라는 느낌의 트랙들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컬렉티브 앨범에 대한 특별한 장르적 특징은 없는데, 이 모임의 특징은 음악에 누구보다도 진심인 음악 너드들, 덕후들이랄까요? (웃음) 음악으로 무언가 멋있는 걸 하고 싶어 하는 ‘음악 지상주의자들 모임’이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GL: 최근 프로듀서 드레스의 정규 앨범 6번 트랙, “금”이란 곡으로도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려주셨어요. 곡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이이언: 서로 이별을 예감하는 연인들의 마음을 다룬 곡이에요. 드레스님이 곡을 쓰시고 제가 제 파트의 가사를 쓰고 불렀는데, 들어보신 분들이 처음엔 곡도 제가 쓴 줄 아셨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정말 제가 썼을 법한 느낌의 (웃음) 저와 잘 어울리는 곡이었어요. 가사도 신경을 많이 썼지만, 보컬 디자인에 정말 공을 많이 들여서 녹음했어요.


GL: 마지막 솔로 음반에서 디지털의 느낌이 강한 음악을 많이 선보이신 것과 달리 비교적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운드가 매력적이었습니다. 힙합, R&B 프로듀서의 앨범에서 만난 이이언 님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번 피처링 참여 과정과 그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이이언: 드레스님의 예전 작업들과 앨범을 좋게 들었어서 SNS도 서로 팔로우하고 있었어요. 긴밀한 교류가 막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서로 리스펙하는 뮤지션들끼리의 내적 친밀감이랄까 (웃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날 디엠으로 피처링 제안을 주셔서 제가 흔쾌히 응했죠. 이후 카카오톡으로 파일과 의견 주고받으면서 아주 순조롭게 작업 진행했어요. 사실 제가 탑라인을 직접 쓰지 않은 곡에 가사를 붙이는 작업은 자주 하는 방식이 아니긴 해서 잘 될런지 처음엔 살짝 걱정도 했었는데, 곡의 느낌이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GL: 최근엔 다양한 음악 장르로 기존에 보여주셨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고 계시는데요, 록, 일렉트로닉 뮤지션으로서 새로운 장르의 뮤지션과의 협업이 어려우시지는 않으셨나요?

이이언: 어렵다기보다는,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제가 최근에 음악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안 해봤던 스타일을 많이 해봤어요. 아이돌 스타일의 음악도 해보고, 힙합이나 R&B의 뉘앙스를 가져온 작업을 해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게 즐겁다고 느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게 예전에 해왔던 음악과 다르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그즈음에는 약간 밴드 씬보다도 힙합 씬에 음악적으로 제일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당시엔 힙합 뮤지션들이 다른 장르들을 흡수하면서 많은 것들을 시도하고, 확장해가고 있었거든요. 새로운 것이 많이 시도되는 곳에서 저도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GL: 조금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연세대학교 전파공학 전공이라는 독특한 학력을 가지고 계세요. 공학계열에서 뮤지션의 길로 전향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이이언: 부모님이 사이먼 & 가펑클이나 송창식, 양희은 등의 포크 음악을 좋아하셨어서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자연히 저도 음악을 좋아하게 돼서 중학교 때부터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고 혼자서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음대 진학도 잠깐 생각을 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은 즐거운 취미라는 생각이 컸죠.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이었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려는 생각을 갖고 공대에 입학했어요. 왜 하필 전파공학과였는지는…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생략하겠습니다. (웃음) 제 개인 블로그의 <헛되었어>라는 글을 보시면 이에 대한 깊은 내용이 담겨있어요. (웃음) 후에 프로그래머나 개발자가 제가 생각해 오던 크리에이티브한 직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대학 생활을 반쯤 허송세월로 보냈어요. 그러다 대학교 3학년 즈음 스매싱 펌킨스의 "1979"라는 곡을 처음 들었던 날에, 그 인트로를 들으면서 ‘아 음악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GL: 어릴 땐 메탈 키드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이언: 맞아요. 중학교 시절에 메탈을 엄청 많이 들었죠. 사실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던 계기가 서점에서 메탈리카의 악보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웃음) 사실 메탈리카가 누구인진 모르고 커버가 너무 예뻐서 읽어보니 오선 악보들이 펼쳐져 있는 거에요. 당시에 집에 있던 컴퓨터로 음악 노트를 입력할 수 있던 구세대의 작곡 소프트웨어가 있었는데, 거기에 메탈리카의 풀 스코어를 입력하기 시작하면서 시퀀싱을 처음 접해본 것 같아요. 그러고 나중에 테이프를 샀죠. 악보를 먼저사고요. (웃음)



GL: 지금은 DAW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엔 컴퓨터 음악이라는 것 자체도 굉장히 희귀했을 것 같습니다. 

이이언: 당시엔 오디오가 지원되는 것이 거의 없었고, MIDI 규격도 일반화가 되기 전이여서 제가 사용하던 시퀀서는 노트 하나를 표현하려면 그에 맞는 트랙, 도미솔을 표현하려면 세 트랙이 필요한 굉장히 원시적인 시퀀서였거든요. (웃음) 오디오는 꿈도 못 꿨고 시퀀서가 지원하는 악기 프리셋만 사용할 수 있는데, 그걸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온갖 꼼수를 사용했었죠. 


GL: 이후 2004년 <비선형>이라는 앨범을 통해 데뷔를 하게 되셨어요. 밴드 못의 결성과 1집을 발매하기까지, 당시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이언: 못은 원맨밴드로 시작해서 혼자 작사, 작곡, 녹음, 프로그래밍을 다 해보면서 공연도 없이 곡만 차곡차곡 쌓아갔어요. 제 홈페이지에만 곡을 발표하고요. 그렇게 1~2년 정도 혼자 작업하다가 인터넷 중고거래 구인 게시판에 기타리스트 구인 광고를 내어서 지이(Z.EE)라는 친구가 합류했죠. 그 후로 같이 재즈 스쿨을 다니며 공부도 하고 같은 곡을 서너 번씩 재녹음해가면서 3년여를 더 작업한 후에야 못 1집을 발매하게 됐어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완성’인지를 알 수 없어서 확신이 생길 때까지 계속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비선형>의 첫 데모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만들었었는데 그때는 Cool Edit Pro라는 프로그램으로 데모를 작업했어요. 마무리는 현재의 ‘DAW’ 시대로 넘어와서 마무리되었죠. 나중에 발매가 될 때에는 제가 믹스한 버전의 러프한 질감이 좋아서 직접 믹스한 버전이 그대로 앨범에 실린 트랙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트랙의 마무리는 스튜디오에서 최종 믹스를 마무리해서 완성되었습니다.



GL: 메탈 키드라고 말씀해 주셨던 과거와 달리 비선형의 음악은 매우 차분한 것 같아요.

이이언: 꽤 긴 시간 차가 있었을 테니까요, 메탈 키드였던 시기랑 <비선형>의 발매까지 15년 정도의 텀이 있어요. 제가 데뷔를 굉장히 늦게한 편이였어요. 


GL: 영원, 영겁을 뜻하는 ‘Aeon’에서 따온 이이언(eAeon)이라는 이름은 못의 음악처럼 굉장히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데요, 뮤지션으로서의 활동명을 이이언이라는 이름으로 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이언: 활동명은 사실 원래는 특별히 따로 지을 생각이 없었는데, 지이가 막 자기는 ‘Z.EE’로 하겠다고 하니 뭔가 밸런스가 안맞는 느낌이더라고요. 본명은 이용현이구요. (웃음) 그래서 연못의 ‘연'을 길게 늘인 발음으로 ‘이언'으로 정했어요. 'Aeon'이라는 영단어는 나중에 골랐고요. 'Ian' 같은 평범한 이름보다 왠지 멋있어 보여서요. (웃음)


Mot - 비선형 (2004)


GL: <비선형>은 데뷔 앨범이지만 파격적인 사운드와 가사로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선에 선정되기도 햇어요. 특히 록, 재즈,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실험적인 음악이 돋보였는데요, 당시 데뷔 앨범만의 유니크한 스타일과 사운드를 얻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셨나요?

이이언: 분명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은 맞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다'는 방법론으로 설명하기는 무척 어려운 것 같아요. 제 안에서 그려지는 음악적 이미지가 있었고 그것을 최대한 잘 구현하려고 몹시 애썼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네요. ‘유니크한 스타일과 사운드를 갖고 싶다’는, 무언가의 아류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의지가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되긴 했어요. 특정한 레퍼런스가 없었죠. 제가 좋게 들었던 모든 것의 총합이 레퍼런스였어요.


GL: 특히 강렬하고 비판적인 가사도 인상적이였는데 , 당시 앨범에 담고자 했던 메시지나 마음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이언: 당연히 무언가를 담지 않고서는 만들 수 없었겠죠. 제가 <비선형>을 만들 때의 원동력은 거의 저의 ‘컴플렉스’였어요. 한때 컴플렉스의 화신처럼 10대, 20대를 살아왔고 외모나 체형, 관계부터 연애가 잘 안 풀리는 것까지, (웃음) 군대를 다녀오면서 저의 이런 것들 조금 괜찮아지긴 했는데 지금 바라보면 그런 온갖 것들이 음악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싶어요.


Mot - 이상한 계절 (2007)


GL: 못의 초기 음악은 ‘강렬한’, ‘비판적인’, ‘잔인한’과 같은 키워드가 연상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실제 음악에는 자극적인 사운드 소스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다만 2집 <이상한 계절>에서, 특히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타이틀인 “Close”를 포함해서 거친 기타 디스토션이 사용되는 등 많은 변화가 느껴졌는데요, 1집에서 2집으로 넘어갈 때의 전환점이 있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이언: 글쎄요, 저는 사실 1집에서 2집으로 넘어갈 때 무언가 크게 전환했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지는 않았어요. 못의 음악, 그 연장선 상에서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본다는 느낌이였습니다. <비선형>이 못의 정중앙역이었다면, <이상한 계절>은 이전 역을 포함해서 더 넓은 것을 커버하는 느낌이었어요. 디스토션을 특히 더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데, “Close”는 1, 2집을 통틀어서도 조금 특별한 트랙이긴 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음악적으로 터치를 하지 않을 테니 딱 한 트랙만 대중적인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했었는데, 내부 모니터링에서 “Close”가 가장 좋은 타이틀이 될 재목이라 생각했어요. 그때 “Close”를 붙잡고 7~8개월 동안 작업하면서 50개 가까이 되는 배리에이션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키도 바꿨다가, 코드도 조금 바꿔보고 했죠. (웃음) 진짜 수많은 버전을 만들다 보니 뭐가 더 나은지 모르겠는 상황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저도, 회사도 만족할 수 있었던 버전이 선정되었고, 지금의 “Close”가 완성되었죠.  대중적으로 나올 수 있으면서, 제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어요.


GL: <이상한 계절>에서는 “Close”외에도 “서울은 흐림”과 같은 좀 더 친숙한 사운드와 표현으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는 트랙들도 많습니다. 스스로 음반을 제작했던 과거와 달리 1집과 2집 사이의 3년이란 시간 동안 씬에서 새롭게 배우게 된 노하우나 기술이 2집에 담겨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이언: 사실 “서울은 흐림”은 1집이 발매가 될 때 즈음 작업했던 <썸>이라는 영화의 스코어링 프로젝트에서 모티프를 얻게 되었어요. 정확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런 OST 작업이나 여러 음악을 만들면서 제가 배운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이 제 작업에 조금의 영향을 끼쳤을 거라 생각해요.



GL: <이상한 계절>과 이후 발매된 솔로 앨범, <Guilt-Free>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음악 세계를 그리게 되었는데, 트랙을 살펴보면 사운드와 멜로디는 차분하지만 특유의 파괴적인 느낌이 더욱 많이 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 평단과 리스너에게 호평을 받은 <비선형> 이후에 부담감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 못의 2집과 솔로 음악은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하셨나요?

이이언: 그때나 지금이나 작업하면서 저를 이끄는 것은, 그때그때 저 자신을 매료시키는 음악적인 무언가에요. 못 시절에는 주로 여러 장르의 관습을 뒤섞으면서 새로운 균형 지점을 발견하는 것에 매료되고 몰두했었던 것 같고요. 솔로 1집 <Guilt-Free> 같은 경우는 정교하고 세밀하게 설계된 디지털 세공품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GL: 디지털 세공품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의외로 이이언 님이 작업한 대부분의 앨범과 프로젝트에서 어쿠스틱한 악기를 많이 들을 수 있고, 특히 베이스는 콘트라 사운드를 즐겨 사용하세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이언: 저는 콘트라 베이스 사운드를 굉장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요. 콘트라만의 질감이랄까요? 기타 소리도 좋지만 콘트라의 묵직하면서도 감정이 담겨있는, 현란하진 않지만 서스테인이 긴 노트로 감정을 보여주는 듯한 그런 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다시 태어나서 악기를 연주를 하게 된다면 콘트라 베이스를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웃음)



eAeon - Guilt-Free (2012)

eAeon - Realize (2012)

 

GL: 직후엔 어쿠스틱 사운드가 더해진 새로운 솔로 앨범 <Realize>로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이셨어요. 디지털 요소가 많은 <Guilt-Free>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이에요.

이이언: <Realize>는 <Guilt-Free> 발매 후 10개월 만에 나오게 된 음반이였는데, 갑자기 완전한 디지털에서 완전한 어쿠스틱으로 새롭게 들려드린 느낌이였죠. <Guilt-Free>에서는 대부분 제가 샘플 차핑을 하는 등 대부분의 음악과 사운드를 제가 완전히 컨트롤한 느낌이었는데, <Realize>, 특히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같은 경우는 제가 악보를 그려서 드리고 세션 분들의 재량으로 완성된 음악이 많습니다. 사실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의 경우 맞춰야하는 섹션이 많았고, 그 리듬이 사실 매우 쉽고 편안한 느낌은 아니였거든요. (웃음) 그걸 맞추기 위해 제가 연주자 분들을 많이 괴롭혔지만, 다들 힘들어하시면서도 재밌게 받아들여주셔서 즐거운 경험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Realize>라는 앨범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제가 컨트롤하지 않고, '어느정도 재량을 세션에게 부여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테스트와도 같았아요. 기존 작업은 저의 컨트롤이 매뉴얼같은 느낌이였다면 나중엔 가이드나 모티프처럼 작용한거죠. 결국 그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결국 당시 함께했던 멤버들과 함께 새롭게 밴드를 구축해서 못 3집은 풀밴드 체제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GL: 이이언 님의 초기 음악을 생각하면 어쿠스틱한 악기 위에 얹어진 실험적인 전자음과 이펙트, 치밀하게 구성된 곡 구성과 화성이 떠오르는데요, ‘공학도의 음악’이라 느껴지기도 해요. 이공계열을 전공한 것이 자신만의 음악과 사운드를 만드는 데에 있어 특정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이언: 공학을 공부한 결과로 이런 음악이 나왔다기보다는 기본적인 저의 어떤 성향이 저로 하여금 이공계열을 전공하게 만들기도 하고, 이런 음악을 만들게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각종 파형과 모듈레이션, 디지털 시그널 프로세싱같은 것들을 지겹도록 배우긴 했으니 전파공학이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웃음) 다른 전공을 택했더라도 아마 비슷한 음악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GL: 음악 전공을 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복잡하고 구조적인 화성을 즐겨 사용해 오고 계세요. 음악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도가 느껴지는데 이론적인 공부를 따로 해오신 적도 있으신가요?

이이언: 중학교 때부터 용돈을 받으면 교보문고 같은 곳에 가서 작곡 이론서를 샀어요. 늘 가방에 한 권씩은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죠. 순전히 재밌어서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30~40권은 족히 읽었을 거에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정식으로 수입이 안 돼서 구하기 힘들었던 버클리 음대의 화성학 교재같은 걸 어렵게 구해서 몹시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실제로 무척 많은 도움이 된 책이기도 해요. 다른 책에서는 본 적 없었던 '모달 하모니'와 같은 신박한 내용들이 있어서 마치 무공 비급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웃음) 1집 발매 전에는 위에서도 잠시 말씀드렸듯이 지이 군과 함께 쟈스(JASS)라는 재즈 스쿨을 다니며 스탠다드 재즈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기도 했네요. 

그리고 사실 못 2집 발매 후에 대학원을 한국예술종합학교 뮤직테크놀로지과로 진학해서 엄밀하게 음악 전공을 안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거기서 드디어 ‘정식' 음악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곳에서의 3년 동안은 전혀 화성학이나 기존의 음악 이론 같은 것을 써서 곡을 쓰지 않았어요. 화성이나 조성, 기존 음악 체계 너머의 음악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연구한 기간이었고, 그 덕분에 제 시야도 크게 넓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대중음악, 조성음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그 너머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제가 추구하고 가야 할 곳은 아니라는 걸 느끼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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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 - 재의 기술 (2016)


GL: 시기상 한예종에서 공부를 한 이후 발매된 못 3집 <재의 기술>은 더욱 더 큰 음악적인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변화는 정식 교육의 영향과 앞서 말씀해주신 새롭게 구축하게된 밴드 체제의 영향 중 어떤 것이 더 크게 작용했나요?

이이언: 아무래도 새롭게 구축된 밴드 체제에서 나오는 사운드의 변화가 크죠. 한예종을 다니면서 영향을 많이 받게된 음반은 <Guilt-Free>였던 것 같습니다. 못 1집, 그때는 시대적으로도 그런 분위기도 있었지만, 저도 디지털보다 반드시 아날로그 사운드를 써야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디지털 악기를 레코딩하려고 하면 아날로그의 질감을 더해야한다는 이유로 새츄레이터를 강하게 사용하거나 Neve /니브/ 프리앰프를 반드시 걸어야 한다는 등 이런 클래식한 방식을 많이 사용했거든요. 한예종을 다니면서 느끼게 된것은 고정 관념을 넘어서 ‘디지털 사운드가 하나의 색깔일 수 있겠다.'는 것이였죠. 지금의 퓨처 베이스 음악이나, 플룸과 같은 뮤지션들을 보면 이런 디지털 사운드를 정면에 세우는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인데, 과거에는 저도 약간 꼭 아날로그의 따뜻함을 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못 3집 <재의 기술>은 꼭 제가 쓴 음악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이 써온 음악들도 함께 더해져 완성되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색깔이 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도 저는 <비선형>과 <이상한 계절>, 못의 큰 흐름과 연장 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궤도에 들어온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GL: 가사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고독, 우울, 후회, 고통과 같은 감정선, 소위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언어를 주로 사용하시는데요, 평소 영감은 어떻게 얻으시는지, 그 영감을 음악에 풀어내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이언: 영감에 관한 것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인데 대답은 항상 같아요. 영감을 얻는 방법이 정해져 있으면 참 좋겠지만, 영감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늘 안테나를 쫑긋 세워두고 지낼 수 밖에 없어요. 언제든 뭔가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해두죠.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하나의 영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내어지는지는, 뭔가 자동적으로 예술가 안에서 일어나는 반사 작용 같은 거라고 느껴져요. 고도로 훈련된 직업 기술과 ‘마법’ 사이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그런 것 처럼요.


GL: 앨범은 물론 수록곡까지, 마치 책이나 영화에서 쓰일듯한 타이틀을 많이 사용해 오셨고, 이러한 감정의 표현도 이이언 님의 음악 특징 중 하나로 느껴집니다. 실제로 책이나 영화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도 있나요?

이이언: 물론 책이나 영화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도 많죠.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솔로 2집의 “Btlf Mind”라는 곡이 있는데, 동명의 영화인 <뷰티풀 마인드>에서 영감을 받고 만들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수학자인데, 연구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망상에도 빠지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패턴을 보면서 패턴이 있다고 생각하는 등 정신이 불안정해져 가는 그런 내용이에요. 나중에 연구를 성공해서 상도 받고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정신이 고쳐지진 않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영혼이 정말 쉽게 다칠 수 있고 고장 나고 망가질 수 있는 거란걸 느꼈어요. 솔로 2집의 제목도 <Fragile>인데 당시엔 저도 힘든 일을 겪던 시기였어요. ‘나도 회복이 안되면 어떻게 하지?’, ‘어쩌면 이미 망가져 버렸는데 내가 모르는 건 아닐까?’와 같은 생각을 했었죠.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 영화를 보고 느꼈던 감정이 모여서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GL: 실제로 김영하, 은희경 작가님 등 여러 문학인들과의 교류가 많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세요. “상실”이나 “날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처럼 문학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이는 트랙들도 많은데, 문학은 이이언 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이이언: 문과 이과 적성검사나 MBTI 테스트를 하면 문과와 이과, T와 F가 거의 50 대 50으로 나와요. 코딩을 좋아하고 논리적인 문제에 대해 골몰하기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추리소설 광이었고 (웃음)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도 소설을 읽곤 했어요. 요즘은 주로 시집을 많이 읽고요. 그런 기질이 제 음악 안에서 ‘서정'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교하고 치밀한 설계의 곡을 쓴다고 해도 결국 서정성을 완전히 놓지 않는 것이 제 음악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 아닐까 해요. 

그 서정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문학인들이 음악가들보다 편한 측면이 있죠. 이야기는 ‘언어'를 사용하니까, 반면 음악가들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는 작품, 음악 그 자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음악가들이 만나서 그들만의 언어로 나누는 얘기는 새 악기라든가 예산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도 있죠. (웃음)


GL: 지금 이이언 님의 음악에 담긴 언어, 색깔에 영향을 준 작가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이언: 저는 기형도 시인을 되게 좋아했어요. 요절한 시인인데,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사람들도 많이 좋아하기도 했었고, 저도 그의 시집을 엄청 많이 읽었습니다. 너무 좋아했었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가 쓰는 가사나 문장의 색깔, 이런 표현에도 영향을 받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허수경 시인도 좋아했는데 이들의 시집이 완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특히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같은 책들은 페이지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여러 번 읽기도 했습니다.


GL: 김영하 작가님과 함께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는 피아노 루프와 디지털 노이즈, 김영하 작가님의 내래이션이 절묘하게 믹스된 독특한 구성의 음악인데요, 이 노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요.

이이언: 이 트랙이 수록된 <Guilt-Free>가 발매되기 얼마 전, 김영하 작가님의 쓰신 동명의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가 출간되었어요. 그때 작가님께서 저에게 북트레일러 작업을 부탁하셨는데, 책의 랜덤한 부분에서 발췌된 부분을 낭독하여 보내주시고, 제가 그 녹음된 내래이션 데이터를 가지고 음악과 영상을 제작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광고로 책 출간과 함께 맞춰 제작한 것인데 그때 북트레일러의 음악을 제 앨범에 실은 케이스입니다. 



GL: 음악과 가사 중 어떤 것을 먼저 완성하시는지, 2가지 요소 중 더욱 신경을 많이 쓰게 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이언: 정해진 룰은 없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 가사가 먼저 완성되는 경우가 작업이 훨씬 순조로워요.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가사 안에는 이미 음악이 들어있어요. 음악이 되길 기다리는 씨앗 같은 것이, 그걸 잘 싹 틔우고 풀어내어 주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반대로 음악 안에는 가사가 들어있지 않죠. 음악은 그 자체로 충분히 완결적이기 때문에 ‘굳이' 그 안에 가사를 담고 있지 않아요. 곡이 먼저 완성되면 거기에 ‘굳이' 가사를 붙이는 작업을 해야 하는 거라, 어울리는 짝을 찾기 위해 정말 고심해야 합니다.


GL: 가사먼저 완벽하게 쓰인 노래, 추후에 가사가 더해진 트랙을 소개해주신다면요?

이이언: 제 음악의 거의 반반인 것 같아요. 다만, 가사를 먼저 쓰는 경우가 자연스럽고 쉽게 완성되는, 저를 좀 덜 고생시키는 경향이 있죠. 음악을 먼저 쓰고 가사를 나중에 더한 곡의 경우에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그러나 불확실성은 더욱 더”, “SCLC”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조금 대체로 덜 서정적이고, 파편적이랄까요? 약간 분열적인 가사들이 많이 붙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GL: “매일 그대와”, “슬픈 마네킹”,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등 리메이크 트랙도 굉장히 많이 작업해 오셨어요. 굉장히 실험적인 사운드로 강한 인상을 남긴 트랙이 많은데, 일반적인 작업 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이이언: ‘이 노래는 이런 노래야’라고 사람들이 기존 곡에 대해 알고 있는 모양, 구조가 있잖아요? 이게 ‘게임의 룰’처럼 작용하는 것 같아요. 기본적인 게임의 룰을 사람들도, 저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게임에 대한 기대를 맞춰주고 배반하는 것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약간 재미있는 음악적 유희랄까요? 리메이크는 게임을 한다는 느낌으로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Night Off - 리뷰(Review) (2018)


GL: 2016년, 언니네이발관의 기타리스트 이능룡 님과 나이트오프라는 팀을 결성하면서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하게 되셨어요. 확고한 음악세계로 수많은 사랑을 받아온 두 분의 만남은 팬들에게 기대와 설렘을 선사하기도 하셨는데요, 나이트오프는 어떤 계기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나요?

이이언: 밴드 씬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웃음) 술자리에서 잔뜩 취해 의기 투합하게 됐죠. 당시엔 둘 다 못 3집 <재의 기술>과 언니네이발관 6집 <홀로 있는 사람들> 작업이 한창이었어서 그 앨범들이 마무리되면 뭔가 해보기로 했어요. 결국 그 두 앨범이 다 마무리된 시점은 그로부터 자그마치 십여 년이 지난 후였답니다.


GL: 이능룡 님도 언니네이발관이라는 밴드로 대중음악씬에 큰 획을 그은 뮤지션이기도 하고, 확실한 세계관과 스타일을 보여주고 계시는 뮤지션이에요. 처음 이능룡 님과의 팀업을 구상할 때, 약간은 부담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기도 해요.

이이언: 능룡이를 알게 된 지 오래된 것도 있지만, 정말로 사람이 좋은 친구라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능룡이와의 작업이 저에게 괴로움이나 스트레스를 줄거라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작업을 시작하고, 함께 작업을 한다는 프로세스가 처음엔 정확히 정리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걸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는 약간 허둥지둥하는 것들이 있었죠. 누가 어떤 일을 맡고, 서로가 어디까지 담당해야 하는지, 최적의 결과가 나오는 지점을 정립하기까지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과정도 힘들거나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잘될 순 없으니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는데, 능룡이랑 그걸 함께 하게 되어서 오히려 더 편했던 것 같아요.


GL: 기존에는 주로 정규 단위로 긴 텀을 두고 음악을 릴리즈 해오셨는데 나이트오프는 EP와 싱글로만 음악을 공개해 오셨어요.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나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에 있어 나이트오프만의 접근 방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이언: 언니네이발관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기존의 제 음악들은 확실히 음악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감상할 것을 전제로 만들었어요. 제가 음악을 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예술 영화나 전시를 볼 때처럼요. 하지만 세상과 함께 점점 음악을 듣는 방식, 상황, 의미 같은 것들이 달라졌고, 또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나이트오프는 청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캐주얼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보겠다는 도전으로 시작했어요. 이게 저한테는 정말 ‘도전’이었던 게, 그렇게 캐주얼한 동시에 저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했거든요. 예전에 제가 하지 않던 방식으로 곡을 만들면서, ‘이런 것도 의의로… 멋있군’ 뭐 이런 발견을 계속하게 되는 작업이었어요. 능룡이에게 배운 것들이 정말 많죠. 

‘정규 앨범 단위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스케일의 작가주의', 뭐 이런 건 나이트오프가 추구하는 방향은 아니에요. 정규로 앨범을 발표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저 그만큼의 트랙수가 쌓여서겠죠.


Night Off -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2023)


GL: 나이트오프의 음악에는 최근에 발매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처럼, 기존의 못과 솔로 앨범과 다른 따뜻함이 많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정규 앨범을 제작하게 된다면 이야기를 담고 싶으세요? 

이이언: 지금 사실 곡들이 꽤 쌓여있어서 이 음악들이 정규가 되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써두었어요. 우선 인간의 감정에 관한 것이 제일 많은 것 같고, 그게 제가 제일 잘 다루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작업 중인 곡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내가 나의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게 하는 나의 마음”이란 곡이 있어요. 저에게 이제 세 살, 네 살이 된 어린 조카가 하나 있는데, 조카가 제 음악, 큰아빠 음악을 엄청 좋아한다는 거예요. (웃음) 집에서 맨날 큰아빠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고, 언제 큰아빠 보러 가냐고 물어보기도 한대요. 근데 정작 막상 저를 만나거나 영상통화를 하면 갑자기 얼어가지고 수줍게 말도 잘 못하고 그러는 거예요. (웃음) 그걸 보면서 되게 어릴 때부터 사람한테는 자기가 마음속에 정말 갖고 있는 생각 같은 게 있는데, 실제 자기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건 사회가 만들어서도 아니고, 그 어린 나이에서부터 자기가 그냥 갖고 있는 수줍음이랄까요? 인간의 본성 중 하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쓰게 되었어요. 

이렇게 인간의 감정, 마음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담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요새 삶은 무엇인가? (웃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고 있는데, 삶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요.


eAeon - Fragile (2021)


GL: 2021년에 발매된 정규 2집, <Fragile>이 이이언 님에게 있어 뮤지션으로서 큰 전환점이 된 음반이고, 음악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겪고 나서 완성되었다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어요. 괜찮으시다면,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었던 이이언 님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이언: 기본적으로 저는 음악이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에요. 타고난 음악적 재능 대신 다른 종류의 어떤 감각을 음악으로 변환시켜 작업을 하는, 굳이 말하자면 집요함이 저의 재능이었겠죠. 작업이 술술 풀린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늘 스트레스를 받으며 집요하게 저를 몰아붙이는 식으로 작업했어요. 

그러다가 2018년에 우울증이 심해졌고 공황발작을 동반한 공황장애를 겪었어요. 그 당시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음악이 내 능력 밖의 일인데 그걸 그동안 억지로 꾸역꾸역 붙들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로 인해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많이 반대하셨었는데, 그때 아버지 말씀을 들을 걸 그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모든 게 힘에 부쳤어요. 나이트오프의 EP를 마지막으로 이제 정말 음악은 그만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서 1년 정도를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하며 음악을 쉬었죠. 

그렇게 음악과 멀리 떨어져 1년 정도가 지나니, 어쩐지 음악 작업 아이디어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거예요. 처음엔 무시했지만 점점 그 빈도가 늘고 점점 매우 구체적인 디테일까지 떠오르다 보니 그걸 그냥 사라지게 둘 수는 없어서 결국 다시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처음 작곡을 배울 때처럼 갑자기 음악이 너무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음악으로부터 가장 먼 곳까지 떠나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해요. 그제야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고, 편안함을 느꼈어요. 그리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음악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잘한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어요. 놀랍게도 그 시점 이후로는 음악에서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GL: 음악이 이이언 님을 힘들게 했지만, 결국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 순기능은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이이언: 순기능이라기보다 이건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 영화, 연극 등 예술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다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해요. 못할 수가 없어서,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안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끊을 수 없어서 이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인 것 같아요. 저도 안 할 수 있으면 안 해보려고 도망도 쳐보고 했는데 결국은 제가 음악을 다시 하고 싶어지고 음악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고 못 잊고 돌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요. 무언가 자기 안에 표현되고자 하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게 쌓여서 꺼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게 되는, 이런 것들이 예술가들의 숙명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GL: 실제로 더욱 실험적인 요소들이 많아졌지만, 몇몇 트랙은 담겨있는 멜로디와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의 겪게 된 변화, 전환점이 <Fragile> 제작에 있어 어떤 색깔을 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이언: 예전 같았으면 사용하지 않았을 악기, 사운드, 코드 진행,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쉽고도 흔한, 하지만 적절하고 좋은 음악적 재료들을 과감히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어요. 독특함, 유니크함에 집착하느라 놓치고 있던 많은 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 유니크함에 대한 집착은 결국 음악이 ‘모국어’가 아니었던 제가 정면 승부를 피하기 위해 선택한 생존 전략이기도 했는데, 저는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제 작업 결과물들이 그런 전략적 규율을 엄격히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런 엄격하고 집착적인 규율과 제약이, 사실은 제가 만들어낸 징크스 내지는 플라시보같은 것이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 거죠. 나이트오프 같은 작업을 해보는 과정에서 느낀 것도 있고, 음악을 그만 두려다가 돌아왔을 때 더 분명히 알게 되었어요. 이제는 그런 혹독한 고행에 가까운 방식을 택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저답고 유니크하면서도 어쩌면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자신이 있었어요. 반대로 말하면, 기존의 방식으론 더 이상 작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Fragile> 앨범에선 저를 가두고 있던 제약이나 자기 검열 없이, 비유하자면 전에는 불량식품이라고 생각해서 먹어보지 않았던 여러 가지 것들을 다 맛보고 좋은 것들을 가져다 썼어요. 전형적인 소리들, 예를 들어 JUNO, Moog /무그/ 신스 사운드처럼 사람들이 시그니처 사운드라고 말하는 것들을 마음껏 썼죠. 적절하다고 생각되면 프리셋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요. 어디선가 들어본 코드 진행도 가져다가 제 음악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eAeon - Mad Tea Party (feat. Swerby) (2020)


GL: 반면 2집의 선공개곡이었던 “Mad Tea Party”는 랜덤한 레이백, 디지털 노이즈 이펙트 등 한편으로 이이언 님이 보여주었던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사운드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이언 님이 겪었던 음악적 변화에 대한 스토리를 몰랐던 리스너라면 오히려 더 강렬한 임팩트로 남았을 것 같은데, 이 곡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나요?

이이언: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웃음) “Mad Tea Party”를 제일 첫 번째 곡으로 작업을 하고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앞서 설명드린 “Btfl Mind”처럼 저의 정신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약간 내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내가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한창 하다가 이게 아이디어로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어서 약간 더 충격적으로 느껴지실 수도 있는 부분이 있었다 생각해요.

“Mad Tea Party”에서도 전에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많이 했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루브, 박자 키핑을 하지 않는 그루브도 써보기도 하고요. 사실은 이런 것들이 1년 정도 작업을 안 하다 보니까 '어? 박자 키핑을 안 하고 드럼을 찍어보면 어떻게 되지?'하고 떠오르게 된 아이디어였어요. DAW에도 그루브 기능이 있잖아요? 이것도 몇 마디 패턴을 두고 밀고 당기면서 반복하는 건데, '이 그루브 감을 일정하지 않게 해서 만든 음악은 어떨까?' 생각이 들었던거죠. 작업을 안하고 있다보니까 이런 게 자꾸 떠오르는데 너무 궁금한 거예요. (웃음) ‘이렇게 해보면 재밌는 게 나올 거 같은데…’같은 마음이 자꾸 생기다 보니까 다시 음악 작업을 시작하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eAeon - 그러지마 (feat. RM) (2021)


GL: 그리고 방탄소년단의 RM이 피처링으로 나선 첫 번째 트랙, “그러지마”는 빌보드 월드디지털 1위를 기록하기도 했어요. 이후 RM의 앨범에 역으로 참여하기도 하셨는데 RM과의 첫 만남, 어떤 방식으로 협업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이이언: 2015년 즈음에 어느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멤버로부터 못 시절부터 팬이었다며 DM이 왔어요. 뭔가 묘한 조합이어서 흥미가 끌려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RM, 남준이었죠. 바르고 건실한 느낌에 음악 취향도 좋았고 (웃음) 대화를 나누어 보니 너무나도 예술가의 영혼을 지녔더라고요. 그 후로 종종 연락을 하며 친해졌어요.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2018년 RM의 솔로 믹스테이프, <Mono>의 “badbye”라는 곡에 '형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하기에 기꺼이 도와주었고, 그 후에 제  <Fragile> 앨범을 만들 때엔 RM이 도와주게 된 거죠. 처음엔 “그러지마” 말고 타이틀 곡도 아닌 “어쩌면"에 피처링을 부탁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심지어 몇 가지 버전의 벌스까지 받았는데, 나중에 남준이가 우연히 작업실에서 “그러지마”를 듣고는 ‘어, 형 저 이 곡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했어요. 두 곡 다 작업해볼 테니 저보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했죠. 사실 이땐 남준이가 이미 한참 월드 슈퍼스타가 되어 버린 상황이어서, 제가 ‘RM’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나 싶기도 했는데 (웃음) 뭐 저야 너무 고마웠고요. 결과적으로 남준이의 선택이 옳았죠. “그러지마”가 너무 멋지게 나와서 그 곡으로 가게 되었고, 차트 성적뿐 아니라 여러 가지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같아요. 


GL: 공식적인 차트 1위가 빌보드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당시 심정이 어떠셨어요?

이이언: 빌보드 차트인은 워낙 당시 BTS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던 시기여서 남준이가 참여하면 예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겠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반응이 뜨거웠었죠. 사실 맨 처음에는 좋으면서도 약간 순전히 '내가 잘해서 잘된 건 아니지 않을까?'싶어서 내가 무언가 크게 성취했다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남준이가 저에게 DM을 보내면서 같이 무언가 해보길 시작하고 그 끝에 이런 작업을 하게 된 것이 제가 못부터 그런 음악을 해왔던 것에 대한 결과로 결국은 여기까지 온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못이나 솔로 앨범을 만들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 테니까요. 제가 해온 음악들이 잘한 일이였구나, 이런 음악들을 해왔던 게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지금도 많은 팬분들이 반응을 해주시는데,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듣고 좋아해 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일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남준이에게도 너무 고맙고, 음악을 해오면서 저에게 일어났던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Night Off - 잠(Sleep) (2018)


GL: YouTube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그러지마”와 “잠”부터 최수진 작가님의 영상과 함께 완성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까지, 이이언 님의 음악은 멋진 뮤직 비디오와 함께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평소 영상이나 영화와 같은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계시는데요, 음악과 영상의 관계에 대한 이이언 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이이언: 음악과 그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영상을 함께 감상하는 경험은 여러 가지 예술적 체험 중에서도 정말 강렬한 시너지를 가져온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에서도 주로 음악과 영상이 어우러지는 오디오비주얼 작업을 많이 했어요. 영상 작업에 대한 욕심은 아직도 사실 크긴 한데, 시간과 에너지라는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외주 작업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음악만 신경 쓰기에도 늘 시간이 모자라다 보니까요...

뮤직 비디오를 만들 때는 사전 미팅이나 기획 회의 등에서 충분히 의견을 전달드리고 이후로는 거의 감독님의 재량에 맡기는 편이에요. 영상의 음악적 리듬감 때문에 편집 포인트에 대해 의견을 드리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GL: 추후 영상 작업물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디어아트 외에 이이언 님의 영상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이이언: 사실 이미 인터넷에 올려둔 게 있긴 있어요. 실험적인 음악과 같이 나오는 영상들이나 북트레일러 작업 때 만든 영상 등 몇 가지 있는데, 이게 YouTube에서 파일이 압축되다 보니까 화질이 많이 깨지더라고요. 일반적인 영상이나 필름은 자연스럽게 압축이 잘 되는데, 매 프레임마다 선이나 픽셀이 빠르게 변하는 영상들은 가장 최근 4K 화질로 올려두어도 잘 표현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이거 보세요!'라고 하기엔 너무 깨져서 약간 민망하기도 합니다. (웃음) 그래도 완전한 영상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최근 최우람 작가님과 함께한 여러 전시처럼 코딩을 포함한 또 다른 미디어아트 작업들이 예정되어 있고, 준비하고 있어요.



GL: 앞서 말씀드렸던 드레스와 RM뿐만 아니라 한희정, 박정현과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고 있는 뮤지션들부터 스월비, 사뮈, 김도언 등 좀 더 젊은 세대의 뮤지션까지, 다양한 콜라보를 선보이고 계십니다. 다른 뮤지션들과 소통하며 음악을 만드는 이이언 님만의 노하우, 과정이 있을까요?

이이언: 상대 뮤지션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저를 필요로 하는 포인트나 맥락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요. 

그리고 최근에 같이 콜라보한 뮤지션들과의 협업은 약간 어떤 특정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웃음) 인스타그램 DM같은 걸로 자주 연락이 와요. 아마 그 친구들이 되게 어렸을 때 제 음악을 듣고, 나중에 자라서 연락이 오는 것 같아요. 약간 씨앗을 수확하는 시기인가? (웃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사실 어렸을 때 제 음악을 들어온 그런 친구들도 있겠지만, 제가 못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모르거나, 나중에 알게 된 친구들도 있거든요. 특정한 이유나 비결이라기보다 그냥 제가 꾸준히 현역 뮤지션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못과 솔로 1집 이후로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런 콜라보도 많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저도 어떤 작업이 되었든 과거에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롭게 지금 시대의 뮤지션으로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고요.


GL: 그동안 함께 음악을 만들어온 뮤지션 들 중 가장 인상 깊게 있었던 뮤지션은 누구인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이언: 다 너무 멋진 분들이었지만, 김도언의 데뷔 앨범에 피처링을 하게 되었을 때 처음 가져온 데모 트랙들을 듣고 정말 너무 근사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작업한 곡뿐만 아니라 모든 트랙이 정말 데뷔 앨범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했어요. 그 이후의 작업과 행보도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데, 정말 비범하고 재능이 있는 친구예요. 10년 정도 후에는 한국 전자음악씬을 이끌어 나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GL: 새롭게 협업해보고 싶은 뮤지션이 있다면 어떤 뮤지션인가요?

이이언 님: 모쿄(Mokyo) 님. 마음속 깊이 팬심을 갖고 있어요. 정말 서정적이고 감정을 건드리면서도 사운드나 장치들이 구조적으로 잘 짜졌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게 되는 음악이거든요. 앞서 말씀드렸던 T와 F의 밸런스가 잘 짜여진 음악, 제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실제로 자주 듣기도 하고요.


GL: 독특한 음악 세계를 가지고 계시는 만큼, 지금의 이이언 님의 세계에 영향을 준 뮤지션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영감을 많이 얻는 뮤지션, 혹은 존경하는 뮤지션이 있다면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이이언: 포티스헤드입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은데 (웃음) 개인적으로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뮤지션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 설명할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음악사에서 음악적인 가능성을 크게 열어젖힌 무언가가 있어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모던 뮤지션들도 많았을 거고요. 모던한 전자음악과 샘플링 기반 음악에 대해 선보인 획기적인 접근, 그 놀라움을 제가 다 이해시켜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웃음)



GL: “날개”에서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까지, 못과 솔로 1집은 고독한 독백이었다면 최근 나이트오프와 솔로 2집의 경우, 보다더 따뜻함을 많이 느낄 수 있어요. 최근 작업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리스너와 소통하길 원하셨는지, 그 방식이 과거와 달라졌다면 어떻게 변화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이언: 아마 대부분의 뮤지션이 마찬가지일 텐데, 첫 앨범, 두 번째 앨범 정도까지는 자기 자신 안에서 꺼내어져 이야기되길 기다리는 것들이 줄을 지어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내 안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 거죠.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노래로 만들어내다 보면, 점점 이제 내 안의 사적인 목소리는 할 말이 줄어요. 이미 내가 하고 싶었던 내 속의 얘기들은 다 했거든요. 물론 삶의 어떤 순간에 새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만나게 되고 그게 정말 소중한 영감이 되어 주지만, 그런 순간 자체가 점점 줄어드는 게 삶의 당연한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내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들에 이입해서 가사를 쓰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같은 곡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요. 요즘은 가사를 쓸 때 제 자신을 마치 소설가처럼 생각하곤 해요. 특히 나이트오프가 그런 접근이 많은 편이고, 솔로 작업은 아무래도 여전히 사적인 부분이 많죠. 그러다 보니 솔로 앨범은 텀이 더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게 음악을 변화하게 했다기보다,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전엔 말하지 않았던 소재들을 더 많이 말하는 거죠. 나이트오프의 “반짝이는 순간들은 너무 예쁘니까”와 같은 곡들을 쓰게 되는 것도 호드와 얨냼, 강아지들과 가족들과의 좋은 시절, 좋게 잘 지내고 있지만 이게 언젠가 끝날 텐데, 그러면 지금의 이 순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고… 근데 우리가 같이 지내는 순간들, 정말 반짝이는 순간들이 너무 예쁘니까 그런 것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스타일이라기보다 예전에 잘 몰랐던, 지나쳤던 것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이야기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GL: 설치, 영상 예술과 음악을 접목한 미디어아트 분야에서도 꾸준히 작업물을 선보이시는데요, 프로그래밍과 같은 보다 전문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된 미디어아트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이언: 위에서 잠깐 뮤직테크놀로지 학과를 다녔던 경험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때 배웠던 툴과 기술, 코딩 언어, 심지어 미학적 관점 같은 것들이 미디어아트 작업에도 그대로 호환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작업 영역이 확장되었죠. 현대미술과 현대음악은 실질적으로 하나의 몸통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GL: 어떻게 보면 멀티-채널 오디오를 처음 시도했던 분야도 설치 예술이에요. 꾸준히 미디어아트 작업을 이어오시는 입장에서 이런 대중음악과 이머시브 오디오, Dolby Atmos®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이언: 저도 이머시브, Dolby Atmos®  /돌비 애트모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이머시브 사운드는 아직 믹싱하는 것에 대한 규칙이 많이 없는 상황, 춘추전국 시대 같은 느낌이에요. 어떤 게 좋은 이머시브 믹싱이다!라는 기준이 확실히 안 나와 있다 보니까 많은 뮤지션들과 엔지니어들이 이것저것 실험해 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많이 들어보고 많이 경험해 봐야 Atmos®로서 어떤 게 더 좋은 것이구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기회가 있을 때 여러 스튜디오에 찾아가 음악을 들어보고 의견도 여쭤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떻게 이머시브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 때, 모든 셋업을 스튜디오처럼 할 수 없다 보니 일반기기들이 스튜디오에서 들리는 것과 얼마나 동일하게 재현해 줄지, 이런 것들도 관건일 것 같아요.



GL: 평소 작업하실 때 어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시나요? 일반적인 음반 작업과 미디어아트 작업에 있어 사용하는 툴이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이이언: DAW는 안 써 본 것이 거의 없어요. 거의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가 지금은 Bitwig Studio /비트윅 스튜디오/에 정착했고 매우 매우 만족합니다.

미디어아트 작업에서 메인으로 사용하는 것은 Cycling ‘74의 Max고요. Max와 연동해서 DAW를 써야 하는 경우엔 Ableton /에이블톤/ Live /라이브/에서 Max for Live /맥스 포 라이브, M4L/ 디바이스를 만들어서 써요. 영상과 연동된 작업을 위해서는 Cinema4D, Houdini 같은 것을 써서 3D 작업을 하고요. 최근에는 TouchDesigner도 쓰기 시작했어요. 코딩이 헤비하게 필요한 경우엔 openFrameworks(C++), Processing(java) 같은 걸 쓰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GL: 거의 모든 DAW를 사용했었다 하셨는데, 마지막엔 Bitwig으로 정착하신 주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이언: 모듈레이션이죠. 기존의 많은 DAW들이 시도했던, DAW 자체를 악기처럼 다룬다는 콘셉트를 새로운 단계로 완성을 시킨 것 같아요. 기본적인 작업은 당연하지만, 무엇이 어떤 것을 트리거 시키고, 그게 다시 새로운 모듈레이션을 발생시켜 특정 플러그인을 움직이게 하는 등 매우 복잡하고 논리적인 알고리즘까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Bitwig의 장점인 것 같아요. 다른 DAW에서는 어렵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들이 Bitwig에서는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느낌이고 엄청 편해요.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쉽게 할 수 있다 보니 사운드를 만들거나, 편곡하는 방식들이 Bitwig을 쓰면서 달라진 부분도 있어요.


GL: 추후 음악이나 프로그래밍에 대하여 교육, 후배 양성에 대한 생각도 있으신가요?

이이언: 후배 양성까지는 아니지만 뮤지션을 대상으로 그들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간단한 코스나 세미나를 열어볼까 생각은 해보고 있어요. M4L같은 것들, 특히 Max는 혼자서 배우기 어렵거든요. 그리고 자신만의 사운드를 구성할 수 있는 Grid를 지원하는 Bitwig같은 경우에도 진짜 좋은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웃음) 제가 전문 교육 기관을 차려서 무엇을 하고 싶다기보단 이런 소프트웨어를 알리면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알리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GL: 나이트오프의 음악은 외부 스튜디오에서 믹스를 하지만 본인의 솔로 프로젝트는 모두 직접 믹스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곡 제작부터 믹스까지 꽤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일 거라 예상되는데, 직접 믹스까지 마무리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이언: 요즘은 나이트오프 곡도 조금씩 제가 믹스를 하고 있어요. 직접 믹스를 하는 건 제가 생각하고 원하는 사운드를 최대한 구현하기 위해서죠. 시간을 들여 작업하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생각이 바뀌는 것을 그때그때 반영할 수도 있고요. 다른 엔지니어에게 제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온전히 설명하고 전달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언제나 한계가 있더라고요. 물론 그분들께 맡기면 더 빠르고 깔끔하게, 그리고 확실히 커머셜하게 정리되긴 하겠지만요.


GL: 지금 사용하시는 작업실을 보면 하드웨어 악기나 프로세서가 많이 없으세요. ITB의 비중이 높은 워크플로우를 선호하시나요?

이이언: 맞아요. 악기도 그렇고 하드웨어도 그렇고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요. 심지어 레코딩을 할 때의 체인도 굳이 아웃보드를 쓰기보다 소프트웨어로 후처리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요새는 UAD도 그렇고, 에뮬레이션 쪽은 다양한 브랜드에서 워낙 잘 나오고 있다 보니까 소프트웨어로만 작업을 하는 것이 크게 부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아날로그 계열 플러그인으로는 우선 UAD를 많이 사용하고요, Solid State Logic /솔리드 스테이트 로직/의 네이티브 플러그인이나 Slate Digital /슬레이트 디지털/의 Virtual Mix Rack /버추얼 믹스 랙, VMR/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GL: 밴드 음악을 오래 해오시기도 했고, 리얼 레코딩, 아날로그 콘솔 믹싱을 직접 경험해 오셨어요. 현대 레코딩 장비나 믹스 도구에서 느껴지는 직접적인 차이점이 있을 것 같아요. 

이이언: 요새 제가 느끼는 건 실제로 스튜디오에서 마이킹하고 하드웨어를 거쳐 받는 톤과 Kemper /켐퍼/와 같은 현대적인 장비의 톤, 그리고 능룡이가 OX - Amp Top Box /옥스 - 앰프 탑 박스/같은 것도 사용했었는데, 이런 현대적인 레코딩 장비와의 미묘한 차이보다 편의성과 실제 음악의 내용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전설적인 클래식 하드웨어를 사용해서 너무 끝내주는 톤이 나왔어!' (웃음) 이럴 수는 있는데, 클래식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더 멋진 리프나 곡 구성을 만드는 게 지금의 제가 추구하는 방향인 것 같아요. 현대적인 장비도 옛날에 있었던 그런 향수 어린 톤을 얼마나 재현해 냈느냐는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고요. 정말 노이즈가 많이 껴서 못듣는 정도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음질 좋은 별로인 노래보다, 음질이 좋지 않아도 잘 만들어진 노래를 더 좋아하잖아요? 이제 저는 완전히 ITB로 작업을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음악에 맞는 소리만 찾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보컬 레코딩을 할 때에는 U87과 1073의 조합을 사용하는데, 예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했던 베이직 세팅이랄까요? (웃음) Apollo x4 /아폴로 x4/의 Unison™ /유니즌/ 프리앰프를 사용할 때에도 1073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GL: 모니터링 헤드폰으로 Slate Digital VSX도 사용하고 계세요. 바이노럴 모델링이라는 독특한 콘셉트의 헤드폰인데, 평소 작업에서 어떻게 활용하시나요?

이이언: VSX는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고, 특히 여행을 다닐 때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모니터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면 좋은데, 여행지에서는 어디 다니면서 차에서 들어보기도 애매하고 하니 VSX가 있으면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면서 쓰고 있어요. 사실 바이노럴 모델링 기능도 좋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모두 바이패스되고 완전히 플랫한 응답으로 재생하는 리니어 모드를 좋아해요. 어떻게 보면 완전히 평평한 응답으로 보정하는 것이 다른 헤드폰으로는 불가능한 건데, 사운드 레퍼런스로 사용할 때 도움이 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리니어를 가장 많이 쓰고, 다른 환경에서의 테스트가 필요할 때, 여러 스튜디오 모델링이나 차 모델링을 필요에 따라 선택하며 사용하고 있죠. 



GL: 못에서부터 나이트오프, 솔로 음반까지 다양한 스타일과 언어로 뻗어나가고 있는 이이언 님의 모든 음악 세계를 통틀어, 추구하는 음악관은 무엇인가요?

이이언: 경계 너머의 새로운 곳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을 좋아해요. 못에서처럼 장르와 스타일의 경계에서 경계를 삐져나가는 이런저런 실험을 해본다거나, 반대로 나이트오프처럼 제가 이전에 해오지 않았던 ‘더 관습적인 룰을 따르는’ 음악으로 저를 확장해 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저 스스로가 음악적인 빅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게임에서처럼, 돌아다니면서 맵을 밝히는 거죠. 뭔가 막연히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는 큰 그림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해요.


GL: 앞서 대중음악과 조성음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그 너머의 세계가 이이언 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걸 느끼게 되었다 말씀해 주셨는데요, ‘경계의 음악’을 추구한다는 말씀과 비슷한 맥락일까요?

이이언: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의 음악은 저도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감정이나 서정과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음악에 기대하는 감정들이 많이 배제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현대의 화성학이 감정적인 음악 진행을 정리해 놓은 것이잖아요? 그런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음악을 만들어보려는 수많은 시도가 역사에 있어왔고, 저도 그것을 배우고 연구도 해봤는데, 결과적으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업이 되기는 했지만 제 마음을 잡아끄는 작업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화성학이나 조성음악 외에도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의 기저에는 관습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이러한 음악만 듣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문화적으로 쌓여와서 우리가 이것을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는 그게 꼭 문화적이고 관습적인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음악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원리가 있는 것 같아요. 협화음이라던가, 템포를 가진 비트, 조성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요. 경계를 벗어난 음악을 공부하다 보니 오히려 역으로 이러한 요소들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끌리게 되는 요소들이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대중음악이면서 또는, 대중음악으로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저를 흥미롭게 하는 것 같아요. 실험음악들 중에 너무 딥하게, 너무 멀리간 나머지 사람들에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이 봤거든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어떠한 '경계'가 저에겐 되게 재미있는 지점이고, 그런 지점에서 실질적인 발전이랄까요? 이렇게 음악적으로 ‘재미있는 일’들이 대부분 그 경계에서 많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GL: 나이트오프와 솔로 활동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계시지만, 많은 팬분들이 못의 음악을 그리워하기도 해요. 못의 4집을 기대해 봐도 좋을까요?

이이언: 음... 언젠가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못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아직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데, 사실 못의 건반이었던, 그리고 제가 음악가로서 동료로서 너무나 존경했던 이하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몇 년 전에 음악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갔어요. 그곳에서 개발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하윤이를 대체할 수 있는 멤버를 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커요. 하윤이가 음악을 하지 않는 것은 전 인류적 손실인데… 음악 업계가 그런 천재를 IT 업계에 빼앗긴 것은 제대로 그 대접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업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 씬을 떠난 천재 음악가들이 어디 하윤이 뿐이겠어요. 

못의 4집 계획에 대해선 다른 멤버들과 가끔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직 하윤이의 공석으로 인한 심리적, 물리적 영향 아래에 있다 보니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은 없어요. 언젠가 4집 앨범을 발매하게 되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GL: 그동안 다양한 음악으로 수많은 사랑을 받아오셨고, 현재까지도 새로운 음악으로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뮤지션으로 도달하고 싶은 목표, 또는 사람들에게 ‘이이언’은 어떤 아티스트로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이이언: 마지막까지 은퇴 없이 음악을 계속하고 싶어요. 사후에 발표될 앨범 하나, 언젠가 제가 죽게 된다면 그 이후에 나올 음반까지도 잘 준비해서 그것으로 제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것이 꿈입니다. 



GL: 향후 계획하고 있는 작업, 또는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이이언: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은, 크게 두 가지의 전혀 반대되는 방향이 있는데요. 하나는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나 배틀즈와 같은 뮤지션처럼 대중음악으로서 갈 수 있는 경계의 끝에 서서 조금씩 그 바깥 영역을 땅따먹기처럼 가져오는 작업이에요. ‘자 이제부터는 이런 것도 대중음악이다!'라는 식으로요. (웃음) 아마 저는 거추장스러워하면서도 거기까지 기어코 서정성을 짊어지고 가겠죠. (웃음)

또 한편으론 나이트오프를 넘어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팝적인 곡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에는 전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팝의 룰’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꺼렸는데, 이젠 음악이 ‘모국어'가 아닌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GL: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읽게 될 팬 분들께, 혹은 이이언 님을 보고 꿈을 키워온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이언: 저를 좋아해 주시는 팬 분들도, 뮤지션들도, 저를 보고 꿈을 키웠던 분들도, 모두 친한 친구나 동료처럼 느껴져요. 제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들을 이해받는 만큼 아마 저도 여러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언제나 고맙고 든든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가 갈 길이 되게 많이 남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도 계속 활동을 할 것이고, 또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거예요. 지금의 제 음악과 다른 무언가를 할 거고, 앞으로도 긴 여정이 남아있을 텐데, 그 여정을 여러분과 계속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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